<aside> <img src="/icons/stars_purple.svg" alt="/icons/stars_purple.svg" width="40px" /> "사회의 법 같은 건,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관념 아래 만들어진 거잖아요…. 이, 인간이 오버드로 진화한 지금도…인류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세요…? 우, 우린 포식자죠! 그들은, 피식자고요…. 세상이 바뀌었다면, 그 세상을 주재하는 질서도 바뀔 필요가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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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으레 퇴색되기 마련이라는데, 그날만큼은 안 그랬다. 먹먹하게 물기를 머금어 흐린 하늘,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공기, 바람이 몰고 온 축축한 냄새마저도 아직까지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 중 하나다. 그래, 그날은 그랬다. 하세가와 아리스는 그저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꼬맹이였고, 그날도 그러다 못해 전날 잔뜩 비가 왔던 흔적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물웅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마가 한참인 여름이었다.

웅덩이에 비친 하늘은 탁하고 꿉꿉했다. 하세가와 아리스는 말없이 그 위로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늘이 졌다. 이번에는 그것을 관두고, 품에서 타로카드를 꺼내 한 장을 뽑았다. 닳을 정도로 외워버린 카드가 이번에도 나왔다. 뜻을 더 찾아볼 필요도 없이 입속으로 왼다. 새로운 시작, 기회.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행위인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자신이 치는 타로에 어떤 효험이 있는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늘 지니고 다니며 뽑아 볼 뿐이다. 효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언제나 그뿐이다.

하세가와 아리스는, 결국, 삶이 지나치게 외로워서 자신이 특별해졌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는 흔한 꼬마에 불과한 것이다.

문득 하세가와 아리스가 생각한다.

차라리 이대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면 좋을 텐데.

다시 웅덩이를 내려다본다. 그 순간 저벅, 발소리가 들리고 쪼그려 앉은 하세가와의 위로 그늘이 진다. 시야 안으로 단정한 가죽 구두가 들어왔다. 철벅, 웅덩이 위로 파문이 인다. 하늘이 파원을 그리며 일렁거린다. 위를 올려다본다. 낯선 사내다. 처음 보는 얼굴.

그가 말한다.

"너였구나, 꼬맹아."

그것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앨리스의 시초다.